전주를 내려다보는 천년 고도,
후백제 견훤의 숨결 따라 걷는 남고산성

전주 남쪽 고덕산 자락을 따라 자리한 남고산성은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고즈넉한 트레킹 명소다.
후백제 견훤이 도성인 전주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다는 이 산성은 고덕산,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 등 전주 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본래 ‘견훤성’ 혹은 ‘고덕산성’이라 불렸던 이곳은 조선 순조 13년(1813년)에 개수되며 ‘남고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남원과 고창으로 통하는 남동쪽 교통 요충지를 지키는 위치에 자리한 이곳은 지금도 전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자 자연과 역사를 모두 품은 산책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산성 둘레는 약 5.3㎞에 이르며, 지금은 성벽 일부가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성가퀴와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천천히 이어지는 능선마다 묵직한 역사의 기운이 느껴진다.
산성 안에는 과거 100여 채의 민가와 4곳의 연못, 25개 우물, 관청과 창고, 화약고, 무기고, 장대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성문은 동서 방향으로 두 곳에 나 있었고, 그 위에는 누각형 건물이 세워져 있었으며 서쪽에는 비밀문이 하나 존재했다고 한다. 성의 중심에는 군 지휘소였던 장대가 자리했고, 지금도 그 일부 흔적은 남아 있다.

남고산성의 산책길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바로 각 봉우리가 지닌 역사와 이야기다. 천경대는 물과 공기, 숲이 어우러진 천혜의 명소로, 예로부터 삼경사(三景寺)라 불린 절이 있어 조용한 산중 산책에 제격이다.
만경대에는 조선 말 정몽주가 고려의 운명을 걱정하며 남긴 우국시가 암각으로 새겨져 있고, 억가지 풍경을 보여준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억경대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전주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이들 세 봉우리는 단순한 풍광이 아닌, 전주의 세월과 문화를 지탱해온 역사적 지점들로 산책길의 깊이를 더한다.
산성 안에는 고즈넉한 사찰 ‘남고사’도 자리하고 있다. 이 사찰은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화한 보덕의 제자 명덕이 668년 신라 문무왕 8년에 창건한 고찰로, 당시에는 ‘남고연국사’로 불렸다.

조선 성종 이후 ‘남고사’로 개칭되었고, 오늘날까지 사천왕문, 대웅전, 관음전, 삼성각 등 전통 불교 건축을 그대로 간직한 채 보존되어 있다.
해질녘이면 이곳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남고모종’이라 불리며 전주팔경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깊고 맑은 울림을 준다.
산성을 오르다 보면 관성묘도 만날 수 있다. 관성묘는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모신 사당으로, 조선 시기 충의의 상징으로 존숭되던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또한 산성 내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정난을 기리는 충경사도 있으며, 당시 남고사의 승려들이 승병으로 활약했다는 기록 역시 이곳이 단순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민족사의 굴곡을 함께한 삶의 터전이었음을 보여준다.

성가퀴와 안내판이 정갈히 설치된 남고산성의 트레킹 코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유산이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을 걷다 보면 전주의 옛 모습이 겹쳐지고, 마주치는 유적 하나하나가 역사 수업의 생생한 교재가 된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숲길과 탁 트인 조망, 오랜 시간을 품은 성벽과 고찰, 그리고 누군가의 숨결을 품은 암각시가 어우러진 이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닌 전주를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다. 남고산성을 따라 걷는 길 위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