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 고요한 마을의 시간
조선 선비와 여중군자의 숨결
가을 산책이 머무는 곳, 영양 두들마을

가을의 공기가 서서히 깊어지는 계절, 바람은 유난히 맑고 서늘하다. 이 바람을 따라 경북의 한 언덕 위로 오르면, 세월의 속도를 잠시 늦춘 듯 고요한 마을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돌담길을 따라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기와지붕의 그림자는 오래된 책장을 넘기는 듯 느릿하고 단단하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걷기만 해도 마음이 맑아진다고 말한다. 시간조차 머물러 있는 듯한 그곳, 바로 영양의 두들마을이다.
옛 선비의 정신이 깃든 언덕 위 마을

두들마을은 이름 그대로 ‘언덕 위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다. 17세기 학자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 들어와 터를 잡은 뒤, 그의 후손인 재령 이씨 가문이 약 400년 동안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이다.
이시명 선생은 이곳에서 학문을 닦으며 제자를 길렀고, 그 정신은 석계고택과 석천서당에 그대로 남아 있다.
기와지붕이 이어진 골목길 사이로는 조선 선비의 절개와 검소한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 절벽에는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 이숭일이 새긴 ‘동대’와 ‘세심대’ 등의 글귀가 또렷하게 남아 있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마다 자연과 학문을 하나로 여겼던 선비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런 풍경 속을 천천히 걸으면,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걷는 듯한 고요한 울림이 스며든다.
음식디미방의 향기로 되살아난 조선의 맛

두들마을의 또 다른 주인공은 조선 여성의 지혜를 대표하는 인물, 장계향 선생이다. 그녀는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집필하여 조선의 음식 문화를 세상에 남겼다.
마을 중심에는 그녀의 삶과 뜻을 기리는 안동 장씨 유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아래쪽에는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음식디미방의 조리법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전통 음식을 직접 맛볼 수 있다. 석류탕, 섭산삼, 수증계, 어만두 등은 단순한 한 끼가 아니라 ‘시간의 맛’을 품은 조선의 미식으로 전해진다.

방문객들은 다도, 전통주 빚기, 한지 공예, 한옥 숙박 등 다양한 체험을 통해 옛사람들의 미학을 몸소 느낄 수 있다.
한옥 마루에 앉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차 한 잔을 음미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깊은 쉼이 된다. 빠른 일상 속에서 잊고 있던 여유가 그 한 모금 속에서 조용히 되살아난다.
이곳에서의 체험은 단순한 관광이 아닌 ‘조선의 삶’을 느끼는 배움의 여정이 된다. 전통과 현재가 자연스럽게 맞닿은 이 마을에서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한국의 미가 은은하게 이어지고 있다.
가을, 가장 한국적인 산책을 만나다

두들마을은 1994년 문화마을로 지정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30여 채의 전통가옥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석계고택과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어우러져 문화적 향취를 더한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돌담길은 가을 햇살 아래 한층 고즈넉하다. 길가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걷다 보면, 바쁜 일상 속 잊고 있던 마음의 여유가 문득 찾아온다.
영양군 관계자는 두들마을을 “가장 한국적인 가을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곳에서는 화려한 관광지의 소음 대신 정갈한 바람소리와 고택의 숨결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잠시 머물러 천천히 걷기만 해도 마음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두들마을은 더욱 고요해진다.
바람이 지나가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듯, 고택의 마루엔 오직 평화만이 내려앉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