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시간 속 은행의 숨결
서산의 가을, 향교를 거닐다
무료로 즐기는 천년의 산책길

바람이 느리게 스며드는 가을 오후, 서산의 한 골목 끝에서 오래된 기와지붕이 시선을 붙든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은은하게 번지면, 그 아래에서 오랜 세월을 견뎌온 거목이 묵묵히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곳에서는 들꽃 하나도, 담장 하나도 시간의 결이 다르다. 사람의 손보다 먼저 이 자리를 지켜온 나무가 있어, 그 앞에 서면 마음이 자연스레 고요해진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이곳의 풍경은 더 단단해지고, 방문객의 발걸음은 조금 더 느려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 느림의 끝에서 서산향교와 은행나무를 만나게 된다.
서산의 시간, 향교에 머물다

서산향교는 조선 태종 6년,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처음 세워졌다. 본래는 서문 밖에 있었으나, 선조 7년인 1574년에 군수 최여림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그 세월이 무색하게도 향교의 기와는 여전히 매끈하고, 대성전 앞마당의 돌계단은 부드럽게 닳아 있다.
이곳의 중심은 제향의 공간인 대성전이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세 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 형식이다.
지붕선이 부드럽게 굽어져 하늘을 감싸듯 펼쳐져 있는 모습은 유교적 단아함을 담고 있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 25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예로부터 학문과 덕을 중시한 전통을 보여준다.
명륜당은 학문을 닦는 곳으로, 앞면 8칸에 옆면 2칸의 규모를 지녔다. 붉은 기둥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아침마다 서산의 안개와 어우러지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은 옛 유생들이 글을 읽고 토론을 나누던 공간으로, 지금도 그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430년의 세월을 품은 은행나무

향교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다.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된 이 나무는 둘레가 약 4미터, 높이가 30미터가 넘는다.
조선시대 이조정랑 한여현이 기록한 『호산록』에 따르면, 1619년 당시 선인들이 향교 경내에 은행나무 네 그루를 심었다고 전해진다.
지금 서산향교에 남은 나무는 그 중 하나로, 약 430년의 세월을 견뎌온 생생한 역사 그 자체다.

가을이면 이 은행나무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향교의 붉은 기둥과 조화를 이룬다. 햇살이 비치면 잎 하나하나가 반짝이며 마치 금빛 물결처럼 출렁인다.
나무 아래에 서면 은은한 바람결에 낙엽이 흩날리고, 그 소리가 마치 오래된 시 한 편을 읊조리는 듯하다.
서산향교를 관리하는 관계자는 “이 은행나무는 세월의 흔적이자 마을 사람들의 정서가 깃든 상징”이라며 “지금도 많은 이들이 가을마다 이곳을 찾아 나무 아래에서 잠시 머문다”고 전했다.
누구나 머무를 수 있는 고즈넉한 쉼터

서산향교와 은행나무는 서산시 동문동, 향교1로 26에 자리한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연중무휴로 개방되어 있어 누구나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다.
주차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차량 접근이 편리하다. 향교 인근에는 주민들이 즐겨 걷는 산책길이 이어져 있어,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면 고즈넉한 마을 풍경까지 함께 즐길 수 있다.
특히 가을의 서산향교는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다. 노란 은행잎이 쌓인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수백 년의 세월이 천천히 스며든 공간에서 마음이 고요해진다.
세월의 무게를 품은 은행나무, 그리고 그 아래 머무는 고요함이 서산향교의 진정한 매력이다. 비용 없이, 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누구나 이곳에서 조선의 숨결과 가을의 정취를 함께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