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산사, 마곡사로의 길
고요한 숲길 따라 걷는 가을
마음이 머무는 천년의 산사

초입부터 바람이 다르다. 깊게 들이마신 공기 속에는 오래된 세월의 향기가 섞여 있다. 숲은 붉은빛으로 물들어가고, 그 사이로 고즈넉한 길 하나가 산사로 이어진다.
걷는 동안 들려오는 건 오롯이 자연의 소리뿐이다. 물소리와 바람, 그리고 새소리가 번갈아 귀를 적신다.
그렇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함께 고요해지는 곳이 있다. 충남 공주에 자리한 마곡사다.
천년의 시간, 평화를 품은 산사

신라 선덕여왕 9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마곡사는 1,3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삼밭의 무성한 삼대처럼 신도가 모였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답게,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웅보전과 대광보전, 해탈문, 사천왕문 등이 절의 중심을 이루며, 곳곳에는 오층석탑과 괘불, 청동향로 등 유서 깊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고려 후기의 귀중한 불경이 금과 은물로 필사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점도 이 사찰의 깊이를 더한다.

이곳은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세월의 고난을 견뎌낸 피난처이기도 하다. 『택리지』에 따르면 마곡사는 임진왜란과 6·25전쟁 속에서도 화마를 피했다.
그래서일까, 전란의 흔적이 거의 없는 마곡사는 조선시대 ‘십승지지’로 꼽히며 평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남았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와 자연환경을 인정받아 마곡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중 하나로 등재되었다.
고요 속의 수행처, 태화선원의 숨결
마곡사의 경내를 걷다 보면, 해탈문과 천왕문 사이 왼편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눈에 띈다. 그곳이 바로 태화선원이다.
선원은 불교에서 수행승들이 참선과 정진을 하는 공간으로, ‘좌선방’ 혹은 ‘선방’이라 부른다.
태화선원은 비록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은 아니지만, 안거 기간마다 수좌 스님들이 모여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처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보다 깊은 정진을 위해 산내 암자인 대원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원암은 근현대 불교의 큰스님인 일타 스님의 부모가 기도 수행을 했던 장소로,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혜정 스님의 출가처로도 전해진다.
세조가 이 일대를 ‘만세불망지지’, 즉 ‘만세토록 잊히지 않을 땅’이라 부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마곡사의 산세는 기가 맑고 순하여 선객들이 깨달음을 얻기에 적합하다고 전해진다.
화두를 들고 묵묵히 앉아 수행하는 스님들의 모습 속에서, 천년의 불심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가을, 고요함을 거닐다
마곡사를 찾은 이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건 ‘평안’이다. 주차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산책길은 완만해 천천히 걷기에 좋고, 그 길을 따라 오르면 시원한 물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여름엔 계곡의 청량함이 반갑고, 가을이면 단풍이 산사를 붉게 물들인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사찰 주변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많다. 아이들이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노니는 동안 어른들은 숲의 그늘 아래서 잠시 쉬어간다.
봄에는 ‘춘마곡’, 가을에는 ‘추갑사’라 불릴 만큼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각기 다르지만, 특히 가을의 마곡사는 빛과 바람이 어우러진 정취가 일품이다.
천년의 숨결이 머무는 길 끝에서

마곡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전란에도, 시대의 격변 속에서도 묵묵히 산중을 지켜낸 이 사찰은 그 자체로 평화의 상징이다.
사찰 곳곳을 거닐다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불전의 향내, 단풍에 물든 마당, 그리고 고요히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까지 —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는 이름보다 더 깊은 가치는, 아마 이곳을 직접 걸어본 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될 것이다.
번잡함을 벗고 싶은 날, 가을의 문턱에서 마곡사로 향해보자. 고요 속에 숨어 있는 천년의 숨결이, 마음 깊은 곳에 오래도록 머무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