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가 춤추는 가을의 산
바람 위로 펼쳐진 은빛 물결
지금, 경주의 무장산으로

가을은 언제나 산을 향한 발걸음을 이끈다. 아침 햇살에 물든 능선과 바람결에 흩날리는 억새는 그 어떤 풍경보다 깊은 계절의 정취를 전한다.
특히 10월의 경주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계절이 된다. 붉게 물든 단풍 사이로 은빛 억새가 부드럽게 일렁이며, 오랜 시간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온 산의 품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에 반짝이는 억새빛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한층 가벼워지는 듯하다.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될 풍경은 오롯이 가을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문무왕의 전설이 깃든 산

무장산은 경주 동쪽, 토함산과 함월산 사이에 자리한 산으로 ‘동대봉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 정상인 무장봉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이 전쟁을 마친 뒤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는 설화를 품고 있다. 이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 ‘무장산’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장엄한 울림을 전한다.
보문관광단지에서 자동차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암곡마을이 산행의 출발점이다. 미나리로 유명한 이 마을은 가을이면 전국에서 몰려드는 등산객들로 활기를 띤다.

모두가 기다리는 순간은 정상에 오르는 그 찰나, 시야 가득 펼쳐지는 억새의 은빛 파도다. 산 전체를 덮은 억새밭이 바람에 일렁이며 하늘빛과 맞닿는 장면은 한 폭의 풍경화와 같다.
이 일대는 한때 목장이 운영되던 곳이었다. 1980년대 목장이 문을 닫은 후, 넓은 초지에 억새가 자연스럽게 자생하며 지금의 군락지를 이루었다.
면적만 약 44만 평에 달하는 드넓은 억새밭은 산중 고원을 떠올리게 한다. 햇빛을 머금은 억새는 윤슬처럼 반짝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의 흐름을 잠시 잊게 한다.
억새가 물든 정상으로 오르는 길

무장산은 해발 624m로 그리 높지 않아 초보자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대표적인 등산 코스는 두 가지다.
능선을 따라 오르는 코스는 다소 경사가 있으나 짧은 시간에 정상에 도달할 수 있고, 완만한 계곡 코스는 오르는 시간이 길지만 한결 여유로운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어느 길을 택하든, 오르는 길목마다 펼쳐지는 풍경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등산로 중간에는 신라시대의 유적지인 무장사지와 삼층석탑이 자리한다. 고요한 산속에서 마주하는 석탑의 실루엣은 천년의 시간을 품은 듯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잠시 숨을 고르며 그 앞에 서면,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특별한 감상이 스며든다.
정상에 닿으면 그 모든 노력이 단번에 보상받는다. 억새밭을 스치는 가을바람이 은은한 소리를 내며 산 전체를 감싼다.
수없이 흔들리는 억새의 물결은 마치 자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화폭 같다.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도 그 끝은 보이지 않으며, 이 순간만큼은 바람조차 머물고 싶어하는 듯하다.
가을이 머무는 자리, 여행의 끝에서

무장산의 억새 군락지는 드라마 <선덕여왕>과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화면 속에서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질 때, 여행자는 한순간 과거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바람 따라 출렁이는 억새 사이를 걷다 보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채워지는 묘한 평온이 느껴진다.
가을빛이 가장 깊어지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가 방문의 절정기다. 다만 이 시기에는 찾는 이가 많아 주차 공간이 부족할 수 있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18번 버스를 타면 암곡마을 입구까지 이동할 수 있다. 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해 왕복 8km 정도의 산행을 마치면, 억새와 하늘이 맞닿은 장면이 기다린다.
이곳의 억새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바람과 햇살, 그리고 시간이 함께 만들어낸 자연의 예술이다.
무장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가을의 경주는 말보다 깊은 울림을 전한다. 지금, 은빛 물결로 물든 그 산에서 계절의 마지막 빛을 만나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