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에 잠긴 신라의 궁전
경주가 품은 고요한 야경
천년의 시간이 머무는 연못

달빛이 부드럽게 번지는 밤, 고요한 수면 위로 궁전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낮의 뜨거운 햇살은 자취를 감추고, 빛과 물이 맞닿은 곳에서 오래된 신라의 숨결이 깨어난다.
잔잔한 바람이 지나가면 물결 속에 반사된 누각이 흔들리고, 그 찰나의 흔들림마저도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이 연못은 오늘도 조용히, 그 시절의 영광을 비춘다.
달빛 아래 드러나는 신라의 별궁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왕궁의 별궁 터로, 왕세자가 거처하며 국가의 경사나 귀빈을 맞이할 때 연회를 열던 곳이다.
문무왕 14년(674)에 연못을 조성하고, 그 가운데 세 개의 섬과 열두 봉우리를 형상화한 언덕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점에서, 단순한 정원이 아닌 신라의 문화적 품격을 드러내는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지는 단정한 사각형 구조로 조성되었으나, 동북쪽 가장자리를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어 어느 각도에서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게 설계되었다.

좁은 연못을 더 넓게 보이게 하려는 신라인의 미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긴 설계다. 이는 단순한 조경을 넘어, 물과 빛,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신라 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조선 시대에는 이곳을 안압지라 불렀다. 신라가 멸망한 뒤엔 폐허가 되어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들었다고 하여, ‘기러기 안(雁)’, ‘오리 압(鴨)’ 자를 쓴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1980년대 발굴된 토기 조각에서 ‘월지’라는 명칭이 새겨진 글자가 발견되면서 본래의 이름이 확인되었고, 현재는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공식 명칭으로 불린다.
신라의 흔적을 품은 연못
1975년, 연못의 물을 걷어내고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는 회랑지와 건물 터 등 26곳이 확인되었다. 이 중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함께 신라 건물지 3곳이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당시 출토된 유물은 무려 3만여 점에 달하며, 그중에는 금동초심지가위와 금동삼존판불, 주령구와 같은 생활 유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왕실의 호화로움보다는 실제 생활의 숨결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의미가 크다.
특히 ‘보상화 무늬 벽돌’에는 문무왕 시기인 680년의 연호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신라 통일기의 핵심 궁전이었음을 뒷받침한다.
임해전은 단순한 부속건물이 아닌, 별궁 전체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았던 공간으로 보인다.
월지는 현재 세 채의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밤이 되면 건물에 은은한 조명이 켜지고, 그 빛이 연못에 비치며 두 개의 세상이 맞닿은 듯한 풍경을 만든다.
이 장면은 경주의 대표적인 야경 명소로 손꼽히며,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야간 관광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경주의 밤, 가장 빛나는 순간
첨성대에서 시작해 천천히 걸으면, 동궁과 월지의 풍경은 더욱 깊이 다가온다. 한낮의 열기가 가라앉은 뒤, 은은한 조명과 바람이 어우러진 이곳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여름에는 주변 연꽃밭이 풍경을 더하며, 겨울엔 찬 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한 빛이 연못을 감싼다. 가족 단위 방문객부터 사진가들까지, 계절을 불문하고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답다”는 여행객들의 말처럼, 동궁과 월지는 어둠 속에서 진가를 드러내는 곳이다.
경주의 야경이 시작되는 곳, 그리고 천년 전 신라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자리. 동궁과 월지는 오늘도 그 고요한 수면 위에, 역사의 빛을 비추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