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산 아래 천년의 숨결
낙엽길 따라 걷는 사찰의 시간
마음을 비우는 가을의 쉼표

낙엽이 산길을 덮는 계절, 바람은 낮게 불고 햇살은 부드럽게 내린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세월의 층위를 고스란히 품은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요 속에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산새의 울음이 낯설지 않다. 긴 세월을 견딘 나무와 바위가 그대로 선 채로, 한 사찰은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가을은 유난히 더 느리게 흘러간다. 바람에 실린 낙엽이 천천히 땅에 내려앉고, 햇살마저도 잠시 머뭇거리며 시간을 늘여놓는 듯하다.
낙영산 품은 천년 고찰, 공림사

충북 괴산군 청천면의 낙영산 아래, 공림사는 마치 시간의 문을 지키는 듯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신라 경문왕 때 자정선사가 수도하던 암자에서 비롯된 절로, 그 덕행이 왕에게 전해져 국사로 봉해질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한다.
하지만 선사는 세속의 부름을 사양하며 “속세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을 전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감동한 왕이 친히 ‘공림사(空林寺)’라 이름을 내리고 현판을 하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공림사는 여러 차례의 흥망을 겪었다. 정종 원년에는 함허당 득통화상이 폐허가 된 절을 다시 세우며 법맥을 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대부분이 소실되고 대웅전만 남았다. 이후 인조 때 다시 중창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토벌 작전으로 전소되어 한동안 폐사 상태로 남았다.
다시 피어난 절, 세월을 품은 유산들

공림사는 폐허가 된 뒤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1965년 박삼주 스님이 극락전과 요사를 재건하며 불심의 불씨를 다시 지폈고, 1980년대부터 13년간 탄성 스님이 중건을 이어갔다.
사찰 경내에는 대웅전과 관음전, 삼성각, 감인선원이 고요히 자리한다. 그중 대웅전은 세월의 흔적이 스민 단아한 목조 건물로, 절제된 곡선이 조용한 품격을 더한다.
또한 사적비와 부도, 석조, 일주문 등이 남아 있어, 그 오랜 역사와 지역의 흐름을 증언하고 있다.
1688년에 세워진 사적비는 공림사의 연혁과 중건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 중기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낙영산의 품에서 걷는 가을길

공림사의 매력은 단지 사찰의 유구한 역사에만 있지 않다. 절 앞을 감싸듯 펼쳐진 느티나무 숲은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며 방문객을 맞이한다.
가을이면 붉고 노란 잎이 바람결에 흩날려,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풍경을 만든다.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고요한 공기가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사찰 뒤편에는 흰 바위가 산의 등줄기를 이루는 낙영산이 우뚝 서 있다. 그 웅장한 산세는 공림사와 한 몸처럼 어우러져, 세월의 무게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전한다.

산길을 조금 오르면 절정에서 내려다보이는 괴산의 들녘이 눈앞에 펼쳐지며, 가을 햇살 아래 황금빛 물결이 반짝인다.
이곳은 화려한 관광지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고요함 속에서 시간을 음미하고, 걷는 발걸음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곳이다.
절 마당에 앉아 잠시 바람을 듣고 있으면, 천년 전 선사들의 숨결이 여전히 머물러 있는 듯하다.
가을의 괴산을 찾는다면, 낙영산의 품 안에서 세월을 품은 이 사찰을 천천히 걸어보길 권한다. 이 길 위에서는 누구나 잠시 세속을 내려놓고, 고요히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