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숲길에 깃든 순례의 시간
한티가 전하는 가을의 위로
걸으며 만나는 믿음의 흔적

가을의 바람이 깊어질수록 사람의 마음은 조용한 길을 찾게 된다. 소란스러운 도심을 벗어나면 낯선 고요 속에서 오래된 숨결이 들려온다.
나뭇잎 사이로 스미는 햇살, 흙냄새에 섞인 바람의 온기, 그리고 그 속에 묵묵히 서 있는 십자가 하나.
그 길 끝에는 오랜 세월을 견딘 신앙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경상북도 칠곡군의 한티순교성지와 한티가는길은 그런 길 위에 있다.
순교의 흔적을 간직한 깊은 산중의 성지

한티순교성지는 동명면의 해발 600m 산속에 자리한다. 이곳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몸을 숨기며 공동체를 이루었던 곳이다.
신자들은 대구 근교의 험한 산속으로 숨어 들어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굽고 숯을 태우며 신앙을 지켜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수차례의 포졸 습격으로 많은 신자가 생을 마감했고, 그들의 순교로 인해 이곳은 ‘한티성지’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의 한티순교성지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중심으로 피정의 집, 대신학교 영성관, 순례자 성당 등이 조성되어 있다.

신자뿐 아니라 일반 방문객에게도 문이 열려 있으며, 피정과 미사, 해설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십자가의 길’, ‘인내의 길’, ‘겸손의 길’로 이어지는 세 개의 순례길은 각각 약 30분 남짓의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사전 예약을 하면 성지 해설을 들으며 천천히 둘러볼 수 있다.
고요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이곳이 단순한 종교 유적이 아니라, 인간의 신념과 생존이 교차한 역사의 현장임을 느낄 수 있다.
깊은 숲속에 세워진 십자가들은 고통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기도다. 한티를 찾는 이들은 “이곳의 정적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맑아진다”고 말한다.
믿음의 길, ‘한티가는길’에서 만나는 걷기의 의미

성지로 향하는 여정은 ‘한티가는길’로 이어진다. 칠곡군과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함께 조성한 이 길은 총 45.6km로, 다섯 구간으로 나뉜다.
각각 ‘돌아보는 길’, ‘비우는 길’, ‘뉘우치는 길’, ‘용서의 길’, ‘사랑의 길’이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다. 왜관읍의 가실성당에서 출발해 신나무골성지, 동명성당, 진남문을 거쳐 한티순교성지에 닿는다.
길의 시작점인 가실성당에서는 스탬프북을 구입할 수 있다. 구간별 인증 장소 20곳에 마련된 스탬프를 모두 모으면 완주 기념 스카프를 한티성지 사무국에서 받을 수 있다.

전 구간은 숲길, 임도, 마을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선물한다. 특히 가을이면 단풍이 길 전체를 붉게 물들이며, 순례자들은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 속에서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한티가는길은 단순한 트레킹 코스가 아니다. 1815년 을해박해 이후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오갔던 신앙의 길을 복원한 것이다.
2016년 칠곡군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정식 개통된 이래, 매년 가을에는 ‘한티가는길 걷기행사’가 열려 신자와 여행객이 함께 걷는다.
걷는 동안 들리는 발자국 소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가 묘하게 어우러져 하나의 기도로 완성된다.
가을, 마음을 내려놓는 여행

한티순교성지와 한티가는길은 종교를 넘어 ‘쉼’의 장소로 기억된다. 피정의 집에서는 숙박이 가능하며, 개인과 단체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아담한 객실과 조용한 마당, 그리고 성지 전체를 감싸는 산의 품이 일상에서 벗어난 평안을 선사한다.
이곳을 찾는 많은 이들은 “길을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 긴 세월을 지나온 성지의 시간과, 발 아래서 부서지는 낙엽의 소리가 그 마음을 다독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 소박함이 한티의 매력이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지금, 조용한 가을 여행지를 찾는 이들에게 한티는 더없이 어울리는 곳이다.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지 발로 걷는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순례의 여정이 된다.
경상북도 칠곡군의 깊은 산속, 고요한 숲과 오래된 십자가가 있는 그곳에서 한 사람의 발걸음은 또 다른 믿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