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도 없이 20년
한 사람의 집념이 만든 성곽
밤이면 조명 아래 환상으로

2월의 거제 바다는 아직 차갑다. 겨울 끝자락의 알싸한 바람이 파도와 함께 밀려오고, 해안선을 따라 걷는 사람들의 옷깃은 여전히 깊숙이 여며져 있다.
그러나 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걷는다. 거제도 남단, 학동 몽돌해변 인근 언덕 위로 올라가면 갑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중세풍 성곽 때문이다.
유럽 어딘가에서 통째로 옮겨온 듯한 이 석조 건축물 앞에 서면, 누구나 같은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 왜 성이 있지?”
이 성의 이름은 ‘매미성’이다. 2003년 한반도를 강타했던 태풍 매미의 그 ‘매미’다. 그해 9월, 태풍은 거제 해안가를 초토화했고, 이곳에서 작은 농사를 짓던 백순삼 씨는 하루아침에 모든 경작지를 잃었다.
바닷물이 밀려와 논밭을 삼키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결심했다. “다시는 자연재해에 내 땅을 빼앗기지 않겠다.”
돌 하나로 시작된 20년의 여정
2004년부터 백순삼 씨는 혼자 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방파제였다.

해수 유입을 막기 위한 돌담 한 줄.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주변에서 구한 돌, 공사장에서 버려진 석재, 바닷가에 밀려온 자갈까지 하나하나 쌓아 올렸다.
설계도는 없었다. 건축 전문가의 조언도 받지 않았다. 오직 “더 높게, 더 튼튼하게”라는 신념만이 그를 움직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한 돌담은 변화했다. 기둥이 세워지고, 아치형 창문이 뚫렸으며, 성벽의 윤곽이 잡혔다.
점차 인근 주민들이 “저기 성 같은 게 있다”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SNS에 사진이 올라가면서 “거제에 유럽 성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연 100만 명이 찾는 거제의 랜드마크
지난 2023년, 매미성은 공식적으로 거제 9경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방문객은 100만 명을 돌파했다.

외도 보타니아, 바람의 언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관광지가 된 것이다. 거제시는 매미성 주변에 주차장과 화장실을 정비했고, 인근 상가에는 카페와 기념품 가게가 들어섰다.
한때 태풍의 상처였던 이곳이 지역 경제를 살리는 관광 자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매미성의 매력은 시간대별로 다르다. 낮에는 푸른 남해 바다를 배경으로 우뚝 선 성벽이 장관을 이룬다. 성벽 사이로 난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은 그 자체로 액자 속 그림이다.
방문객들은 이 창을 프레임 삼아 인증샷을 찍기 위해 줄을 선다. 밤이 되면 분위기는 또 달라진다.
최근 설치된 경관 조명이 켜지면서 성은 신비로운 중세 요새처럼 변모한다. 조명 아래 드러나는 석재의 질감, 그림자가 만드는 입체감은 낮과는 전혀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매미성을 방문하려면 거제시 동부면 학동리로 향하면 된다. 학동 몽돌해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으며, 무료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다만 방문객이 많은 주말에는 주차 대기 시간이 길어질 수 있으니 오전 일찍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매미성 인근에는 학동 흑진주 몽돌해변, 지세포 해양공원 등 거제의 주요 관광지가 모여 있어 하루 코스로 둘러보기 좋다.
매미성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아름다운 건축물”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성은 한 사람의 의지,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 그리고 2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방문객들은 성벽을 만지며 말한다. “이 돌 하나하나를 혼자 쌓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향후 매미성의 문화유산 등록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개인이 만든 건축물을 공식 문화재로 인정하는 사례는 드물지만, 매미성의 상징성과 사회적 가치를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다.
겨울이 저물어가는 2월의 매미성은 조용하다. 성한기철 관광객의 북적임은 잦아들고, 오직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성벽을 스친다.
하지만 바로 그 고요 속에서, 한 사람이 20년간 쌓아 올린 집념의 무게가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돌 하나가 모여 벽이 되고, 벽이 모여 성이 되었듯, 작은 결심 하나가 100만 명의 감동으로 이어졌다. 매미성은 묻는다. “당신의 돌 하나는 무엇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