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아래 서 있는 천년의 증인
안동에서 만나는 생명의 시간
천연기념물로 남은 노거수의 품격

한 계절이 저물어갈 무렵, 노랗게 물든 잎들이 바람결에 흩날린다. 그 아래, 오랜 세월을 견디며 한자리에 뿌리내린 거목이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색을 달리하고, 마을의 흥망과 함께 숨을 쉬어온 나무다. 누구에게는 단순한 풍경이지만, 누군가에겐 그 자체로 시간을 품은 역사다.
그 나무 앞에 서면, 자연이 세월을 기록하는 방식이 얼마나 묵직한지 비로소 느껴진다.
천년의 세월을 견딘 거목,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에 자리한 ‘용계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75호로 지정된 보호수다.
높이 약 47미터, 둘레가 14미터에 달해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한다.
수령은 700년을 훌쩍 넘은 것으로 추정되며,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의 안녕을 지켜온 존재로 여겨져 왔다.
이 거대한 은행나무는 한때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임하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살리기 위한 결단을 내렸다.

나무를 뽑아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흙을 15미터 높이로 쌓아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를 수직으로 들어 올리는 ‘상식(上植)’ 작업이 진행됐다.
4년에 걸친 공사와 25억 원의 비용, 그리고 500톤에 달하는 무게를 견딘 이식은 결국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 전례 없는 이식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로 평가받으며 ‘세계 최대 규모의 나무 상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단순한 보존을 넘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기 위해 만들어낸 감동적인 기록이자 기술의 상징으로 남았다.
마을의 기억이 깃든 나무 아래에서

이 은행나무에는 조선 선조 시절 훈련대장이던 탁순창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온 뒤 뜻이 맞는 이들과 ‘은행나무 계’를 만들어 매년 7월이면 나무 아래 모여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마을은 사라졌지만, 탁씨의 후손들은 지금도 해마다 이 나무에 제사를 올리며 조상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용계리 은행나무는 단순한 수목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상징으로 존재해왔다. 주민들이 함께 돌보고 지켜온 그 마음이 나무의 생명력에 스며든 듯하다.
그 아래에 서면 거대한 뿌리와 함께 이어진 공동체의 이야기가 느껴진다.
가을, 황금빛 향연으로 물드는 명소

지금의 용계리 은행나무는 단풍의 절정기에 가장 빛난다. 주위를 감싸는 단풍나무들이 붉고 노랗게 물들면, 인공섬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그림처럼 변한다.
이곳을 찾으려면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인공섬으로 이어진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지나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나무의 굵은 몸통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하늘을 가르며, 그 아래로는 햇살이 잎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든다.

가을이 짙어갈수록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도 늘어난다. 그러나 이 나무가 주는 감동은 단지 풍경에 있지 않다.
천년 가까운 세월을 버텨온 생명력, 그리고 이를 지켜온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안동의 용계리 은행나무는 지금 이 계절, 꼭 한 번 찾아봐야 할 가을의 명소다. 자연이 만든 예술 작품이자, 인간이 지켜낸 시간의 기념비로서 그 자리에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