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억새로 물드는 가을 산굼부리
제주의 가을빛을 품은 분화구
자연이 만든 살아 있는 억새 정원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제주의 중산간에는 한 폭의 은빛 물결이 일어난다. 햇살에 따라 반짝이는 억새밭은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에 흔적을 남기듯 부드럽게 흔들린다.
그 중심에는 마치 세월이 잠시 멈춘 듯한 거대한 분화구, 산굼부리가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담담하게 자연의 시간을 품은 이곳은 지금, 억새의 절정기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유일의 마르, 신비로운 분화구
산굼부리는 제주도 조천읍 비자림로에 자리한 천연기념물로, 둘레가 2km가 넘는 거대한 화구다. 제주의 수많은 오름 중에서도 유독 특별한 이유는 분화 과정에 있다.
다른 오름들이 용암이나 화산재가 분출하며 형성된 것과 달리, 산굼부리는 폭발로 주변 암석이 날아가며 구멍만 남은 형태를 보인다.
이런 화산 형태를 ‘마르(Maar)’라고 하며, 국내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희귀 지형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된다.

분화구 내부는 물이 스며드는 틈이 많아 습지 대신 식물의 낙원이 만들어졌다.
내부 높이에 따라 온대와 난대 식생이 동시에 존재하며, 햇빛이 잘 드는 북쪽에는 붉가시나무, 후박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자란다.
반대로 그늘이 드리운 남쪽에는 상수리나무와 단풍나무 같은 낙엽수가 군락을 이루어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이처럼 하나의 분화구 안에서 서로 다른 기후대의 식생을 볼 수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억새로 덮인 가을, 은빛 파도가 이는 풍경

10월의 산굼부리는 억새의 바다로 변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언덕 위를 덮은 억새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파도처럼 번져 나간다.
관광객들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억새가 빚어내는 은빛 장관을 감상한다. 곳곳에 조성된 포토존에서는 어디서든 그림 같은 사진을 남길 수 있어 최근에는 가을철 대표 사진 명소로 손꼽히고 있다.
방문객들은 입을 모아 “억새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걸을수록 마음이 탁 트인다”라고 말한다.
맑은 날에는 하늘에 흰 구름이 둥실 떠올라 억새밭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멀리 성산일출봉까지 조망할 수 있어 풍경의 깊이가 더해진다.
저녁 무렵이면 노을빛이 억새에 스며들어 분화구 전체가 금빛으로 물든다. 이 순간, 산굼부리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자연의 예술 무대로 변한다.
사계절의 생태 정원, 학술적 가치 또한 높다

산굼부리는 억새뿐 아니라 다양한 식물과 동물이 공존하는 생태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 봄이면 물매화와 복수초가 피어나고, 여름엔 초록의 조릿대와 왕쥐똥나무가 자란다.
가을에는 억새가, 겨울에는 설경이 덮여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풍경을 선사한다. 또한 분화구 안팎에는 노루, 오소리 같은 야생동물의 흔적이 발견되며, 조류와 파충류도 서식해 생태 연구의 중요한 현장으로 꼽힌다.
분화구 내부의 다양한 군락지 중에서도 왕쥐똥나무와 변산바람꽃 군락은 보존 상태가 뛰어나 학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결이 한층 세밀하게 느껴진다. 억새밭 사이를 따라 난 산책로는 완만해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 좋으며, 사진을 찍지 않아도 그 자체로 눈에 담는 풍경이 완성된다.
여행 정보를 곁들인 실용 안내

산굼부리는 연중무휴로 운영되며, 계절에 따라 개장 시간이 달라진다. 봄과 가을(3~6월, 9~10월)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 40분까지, 여름과 겨울에는 오후 5시 40분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7,000원이며, 만 65세 이상 시니어와 도민, 국가유공자, 장애인은 5,000원으로 할인된다.
주차장은 넓게 마련되어 있으며,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무장애 통로와 장애인 화장실, 대여용 휠체어도 구비되어 있다.

지금의 산굼부리는 억새가 절정을 맞이한 계절이다. 제주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만들어내는 은빛 물결은 그 어떤 장식보다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닌다.
조용히 분화구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면, 오래된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올가을, 제주의 가을빛이 머무는 산굼부리에서 바람과 억새가 노래하는 풍경을 만나보길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