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 세월이 지켜본 노란 거목
가을빛이 머무는 인천의 숨결
장수동 은행나무의 고요한 위엄

한 계절이 서서히 물러날 즈음, 인천 남쪽 자락에는 여전히 노란빛으로 가을을 붙잡고 있는 한 나무가 있다.
가지 끝마다 햇살을 품은 잎들이 천천히 흔들리고, 그 아래를 걷는 이들은 누구나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수백 년의 세월이 만든 깊은 그늘은 잠시 머무는 이의 발걸음까지도 느리게 만든다.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저 나무 하나일 뿐’이라 생각하지만, 그 앞에 서는 순간 마음이 달라진다.
800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존재감은 말보다 크고, 눈앞의 풍경은 그 어떤 기념비보다 장엄하다.
마을의 수호신, 천연기념물로 거듭나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소래산 입구에 자리한 장수동 은행나무는 수령 약 800년에 이르는 고목이다. 높이는 약 30m, 둘레는 8m를 훌쩍 넘는다.
오랜 세월에도 여전히 푸르고 견고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방사형으로 뻗은 가지들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이 나무는 1992년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된 데 이어, 2021년 2월에는 천연기념물로 승격되어 국가 차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단순한 자연 유산이 아니라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의 믿음과 정성이 깃든 상징이었다.

예로부터 마을에 전염병이 돌거나 집안에 액운이 닥치면 주민들은 나무 앞에 제물을 올리며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빌었다.
매년 음력 7월 초하루에는 공동체가 함께 모여 제를 지내며 나무를 수호신처럼 모셨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은행나무에 깃든 신이 인재의 기운을 모두 거두어 간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 장수의 복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지금도 ‘은행나무 가지나 잎을 집에 들이지 않는다’는 금기가 남아 있다.
노란빛의 절정, 가을이 머무는 자리

가을이면 장수동 은행나무는 황금빛 옷으로 갈아입는다. 잎들이 바람을 따라 흩날리면 마치 하늘에서 비단 조각이 쏟아지는 듯한 장관이 펼쳐진다.
여행객들은 이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무 앞에서 사진을 남기곤 한다. 한 방문객은 “실제로 보면 규모가 상상 이상이라 압도된다”며 “가을빛이 가장 고운 때, 이 나무 아래에 서면 시간마저 멈춘 듯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오래된 나무가 여전히 서 있다는 게 놀랍고 감사하다. 단풍철이면 인천대공원 나들이 중 꼭 들르는 곳”이라며 그 매력을 전했다.

현재는 보호를 위해 펜스가 설치되어 나무에 직접 닿을 수는 없지만, 그 너머로도 느껴지는 존재감은 여전하다.
햇살이 잎사귀 사이를 비추는 오후, 나무 아래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황금빛 잎이 반짝이며 빛의 파도를 이루고, 흐린 날에는 더욱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함께 걷는 길, 가을이 완성되는 산책

장수동 은행나무를 찾았다면 소래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소래산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해 은행나무까지 이어지는 길은 완만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어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여유가 있다면 인천대공원 동문 쪽으로 발길을 옮겨보는 것도 좋다. 단풍이 물든 길과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이어져 가을의 정취를 한층 깊게 만든다.
이 지역에는 카페와 작은 음식점도 가까이 있어 당일 여행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인근 주민들은 주말마다 이곳을 산책 코스로 즐기며, 나무 아래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특히 11월 초순이면 은행잎이 가장 고운 빛으로 물들기 시작해 주말마다 방문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800년의 시간이 들려주는 이야기

장수동 은행나무는 단순한 경관을 넘어, 시간의 무게와 사람의 마음을 함께 품은 존재다. 이 나무는 수백 년 동안 폭풍과 비바람을 견디며 한 자리를 지켜왔다.
그 앞에 서면 자연이 인간보다 오래 살아온 이유를 깨닫게 된다. 도시의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은행나무의 모습은, 세월을 이겨낸 생명의 힘이자 이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가을이 깊어지는 지금, 인천의 남쪽 끝에서 노랗게 타오르는 그 나무 한 그루가 있다. 800년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고요한 위엄 속에서, 오늘도 사람들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그 아래에서 계절의 끝을 느낀다.


















